처음으로(Home) | 프로필(Profile) | 관련 자료(Articles) | 사진 자료(Photos) | 동영상 자료(Clips) | 관련 링크(Links)

1997년 객석 인터뷰([이달의 음악가] 베이스 강병운/자라스트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뉴스 제공 시각: 1997년 4월 1일

지난 3월 20, 21일에 벌어진 바그너 축제는 또 하나의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베이스 강병운이 마침내 우리 곁에 돌아와 활동을 개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동양 최초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역으로 활동한 사람. 한국 유일의 정통 바그네리언, 강병운의 철학과 계획을 듣는다

“나는 사실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20년 이상 노래해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첫 말이었다. 20년 이상 노래를 해왔다는 것과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왜 같은 선상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를 처음엔 알 수 없었다.

“연주자란 오랜 관록과 경력을 통해 인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칼라나 메트에 데뷔했다는 것 자체로 스타가 되고, 그렇게 잠시 반짝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성악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모두들 어느 콩쿠르에 우승했다거나, 어디서 데뷔했다고 하면 그것이 전부인 양 ‘세계적 성악가’ 운운하면서 떠들어댑니다. 그때부터 시작인데 말이에요. 언론이 반성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흐름이 계속되면 젊은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미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꾸준히 길을 닦아서 성공해야 하는데, 하루 아침에 반짝 스타가 될 길만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름지기 연주자란 최소 10년은 살펴보아야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부류 중 하나다. 첫째는 자신의 나이나 경험을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고서 젊은 세태를 멸시하는 , 이른바 ‘나이가 전부’인 사람이며, 둘째는 정말 부정할 수 없는 경험과 실력이 있어, 그의 경험으로 현재를 비판(비난이 아니다)하는 유형이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보아도 그가 두번째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연주자란 오랜 경력으로 증명되는 것

강병운. 성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이름이다. 동양인 최초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역으로 활동한 그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요즘 식으로’ 빛나지는 않는다. 이미 ‘나이를 꽤 먹었고’, ‘오래 전부터’ 유명했으며, 자신의 세계에 대한 ‘고집’도 강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요즘 세상에서 소위 ‘스타’가 될 수 있는 요건을 보여주는 말이다. 오늘날에 있어 아티스트의 상품가치 기준이란, 젊어야 하고, 느닷없이 튀어나오며(입지전적인 경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매체나 흐름에 따라 적절히 자신을 굽힐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전엔 대중가요의 영역에서나 적용되던 이 원리가 이젠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반짝 시스템은 예술의 경영난에서 온 것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가 그 온상이죠. 이제는 이 먹구름이 유럽에도 닥쳐옵니다. 시나 정부의 문화지원이 계속 삭감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소위 ‘반짝 스타’를 키우고, 그들을 기용하기 시작합니다. 개런티가 싼 데다, 고분고분하기 때문이죠. 여기엔 음반 산업도 큰 몫을 합니다. 70,80년대엔 큰 오페라단이나 페스티벌의 주역이 아니면 음반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음반을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음반이 홍보 수단이 되었습니다. 일단 음반을 내놓고 홍보한 후, 그를 통해 인기를 얻고서, 오페라나 페스티벌에 입성하려는 식입니다. 한순간에 스타가 되고, 그걸로 장사하고, 그리곤 사그라지는 그런 시대죠.”

그의 얘기는 계속된다.

“카라얀 같은 인물도 마인츠라는 작은 도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츰 올라왔습니다. 이번 바그너 축제에서 지휘를 맡은 한스 발라트의 경우에도 군소 오페라단에서 만하임 오페라단으로 오기까지 적어도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나만 해도 바이로이트에 서기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계를 마구 뛰어넘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언론의 반짝 쇼로 말이죠.”

그는 이 대목에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독일의 오페라 연습이 어떤지 아십니까? 매일 10시에 시작해 오전에 3시간 연습하고 다시 오후에 5시간을 연습합니다. 중노동이죠. 나 같은 경우엔 79년에 만하임 오페라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10년 동안 그렇게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오페라 가수는 마이스터 과정에 입문한 도제의 대우를 해줍니다.”

그는 묻고 싶은 것이다.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되어가느냐고, 어째서 가장 고귀하다고 여겼던 예술마저도 ‘반짝 쇼’에 물들어가냐고, 왜 날이 갈수록 그런 사람들만 돈을 벌고 박수까지 받게 되느냐고….

“앞으로 개선될까요?”

“비관적입니다.”

동양 최초의 바이로이트 주역

1948년생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이내 경주로 옮겨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내 음악의 온상은 교회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1969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재학시 베를린 국립음대 성악과장인 헤르베르트 브라우어 교수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발탁되어 베를린 국립음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게 1974년이었다.

베를린에 온 지 반 년 정도 지났을 무렵 베를린 오페라하우스의 단원 오디션이 있었고, 우연찮게 디밀어본 오디션에서 그가 발탁되었다. “당시 마르티 탈벨라가 거기서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었죠. 들어가긴 했는데, 훈련이 어찌나 엄격하던지 따라가느라 혼났어요. 아직 학생 신분인 데다, 언어도 딸리고, 게다가 동양인은 처음이라 모두들 원숭이 보듯 했죠.”

그가 받은 설움이니, 어려움이니 하는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므로. 이런저런 어려움을 딛고 그는 1976년 베를린에서 ‘가면 무도회’의 자무엘 역으로 데뷔했다. 호세 카레라스가 처음 독일에 데뷔한 바로 그 무대였다고 한다.

그후 킬 오페라단에서 주역 청탁이 들어왔다. 킬에서 2년을 보내는 동안 베르디·모차르트 등 6, 7개 오페라의 주역을 맡았다. 킬에서의 경력은 알게 모르게 퍼져나갔다. 부퍼탈 오페라가 그를 기용했고, 이어 뉘른베르크 오페라단이 그를 주역으로 발탁했다. 만하임 극장도 거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그의 지명도는 점점 높아져서 연중 90∼150회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되었다.

1986년에 다니엘 바렌보임이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링 사이클’의 새 공연을 맡게 되었다. 베이스 역을 공개 오디션했다. 모든 평, 모든 경력, 그때의 노래 등을 종합한 오디션에서 강병운이라는 동양인이 발탁되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역. 이것은 최소한 독일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것이 틀림없다.

동양인으로선 최초의 바이로이트 입성이었으니 신문지상이 떠들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8년, 드디어 바렌보임이 지휘하고 하리 쿠퍼가 연출을 맡은 새로운 ‘링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 무대에서 92년까지 5년 동안 주역 가수로 활약했다.

단단하고 풍부한 저음과 매끈한 고음에 대해 독일 신문들은 ‘벨 칸토 베이스’라고 격찬했다. 이탈리아적인 테크닉과 독일적인 해석의 깊이를 아울러 갖춘 사람이라는 찬사였다.

“독일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밝고, 멜로딕하고, 즉각적으로 다가오죠. 소리도 테크니컬한 소리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독일 오페라나 가곡은 시간이 필요한 깊은 작업입니다. 별다른 테크닉 없이 자연스럽게, 몸에 무리없이 부르는 것을 요구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요구죠. 무엇보다도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테크닉에다 독일적인 깊이를 겸비할 수 있다면 성악가로선 가장 이상적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여기서 부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의 경우 바그네리언으로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단지 바그네리언일 뿐’이라고 묘하게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강병운은 마리오 델 모나코 콩쿠르(79년), 토티 달 몬테 콩쿠르(82년) 등의 콩쿠르에서 1위 입상했고, 82년에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로 데뷔했으며, 당시 라 스칼라에서 그를 손짓한 적도 있다.

“바그네리언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선 약간 섭섭합니다. 바질리오든 보리스 고두노프든 베이스로선 안해 본 역이 없는데, 사람들이 바이로이트 이전의 활동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그의 섭섭함은 일리가 있다.

성악가는 수도승의 길

강병운이 오랜 외국 생활을 대충 정리하고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것이 95년 봄학기부터의 일이다.

“오랜 연주생활…. 하고 싶은 만큼 해보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그 생활의 반복밖에 안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제 내 나이 곧 50입니다. 아이들을 어디서 키울 것인지, 아내와 어디서 만년을 맞을 것인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서양 사람이면 이런 생각도 안했겠죠. 또한 그 생각을 하게 되니까 아직 목소리가 남아 있을 때 후배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돌이켜볼 때 삶의 3분의 1은 다음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냈습니다. 또한 3분의 1은 외국 생활에서, 정상에 오르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나머지 3분의 1이 시작되는 거라고 봅니다. 내게 남은 또 다른 ‘달란트’를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흔히들 거창하게 장식하는 ‘귀국 독창회’니 ‘특별 리사이틀’이니 하는 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번 바그너 축제가 그가 귀국해 제 모습을 보여준 첫 무대나 다름없다.

“천천히… 지금으로선 가르치는 일에도 시간이 없습니다. 외국을 들락날락하는 데다, 연주회까지 가지면 언제 레슨을 합니까.”

그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일단 두 가지다. 레슨 시간을 잘 지킬 것. 그리고 몸 관리에 철저할 것.

“감기에 걸려 레슨을 못 받겠다는 둥 하는 그런 소리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악가는 몸이 악기입니다. 몸을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한 겁니다. 꼭 하고 싶다고 달려들어도 안되는 판에 그런 자세로는 결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테크닉이나 해석 이전에 가장 필요한 것은 프로 의식입니다.”

그의 음성이 좀더 높아졌다.

“성악가는 몸이 악기입니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술이든, 담배든, 여자든, 아주 많은 것을 절제해야 하는, 마치 수도승 같은 직업이죠. 가족들마저 거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길고 험한 길이죠. 사람들이 성악가를 두고 누가 더 높은 소리를 내느냐,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느냐로 따지는 것을 보면 화가 나다 못해 우스워요. 테너의 하이 C가 전부가 아니며, 큰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며, 또한 모든 노래가 다 똑같이 불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수없는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오페라 무대도 커다란 콘서트도 아닙니다. 교회를 돌면서 작은 리사이틀을 열고 싶습니다. 성가로 말이죠. 나는 내가 받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잘 먹고 잘 살려는 길이 아닙니다. 음악은 하늘이 주는 재능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구하고 찾은 기쁨을 나눠갖자는 것이 음악 정신입니다. ”